주일예배설교

  • 홈 >
  • 설 교 >
  • 주일예배설교
주일예배설교
두 행악자 송규철 목사 2025-01-12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6

http://sangil.onmam.com/bbs/bbsView/7/6499496

[성경본문] 누가복음23:39-43절 개역개정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죄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폭로되었을 때 행악자처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악자는 자신이 행한 일이 모두 죄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에 자신의 죽음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악자는 예수님을 행한 것에 옳지 않음이 없는 진리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행악자의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성령의 가르침’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말씀한 낙원을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행악자는 예수님을 진리로 바라봤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에게 기쁨은 진리이신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겠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으로 행악자에게는 이미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네가 너를 구원하라”“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들에게 구원자는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구원자가 십자가에서 사형 당해 죽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도 죽는 입장에 있는데 그러한 처지의 예수님께 뭘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행악자처럼 자기 실존에 대해 눈을 뜨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구원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행악자를 죽이는 사형도구였을 뿐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이 당연하다는 자기 실존에 눈을 뜨게 되면 죄 없는 예수님이 왜 자기와 함께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을 부탁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강도는 죽음을 자기 행위에 따른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형편에서 건짐 받기를 기대하고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죄 없는 몸으로 죽음의 길을 가는 예수만이 진리이시고 그 예수가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은 행악자만이 아니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를 향해 있습니다. 종말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허락되어 있음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자는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구원자가 십자가에서 사형 당해 죽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악자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뿐이지 체험한 특별한 기적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현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 그대로였습니다. 그러한 고통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자신에게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약속하신 생명의 세계를 이루시는 일은 현실의 문제에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 어떤 현실에서도 자기 실존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자에게 함께 해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신자는 세상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것은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이름에 걸맞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답을 본문의 한편 행악자를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죽음을 당연한 보응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이러한 감격으로 다가오고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해주시는 낙원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예수님의 죽음 운영자 2025.03.02 0 16
다음글 믿음의 선물 운영자 2025.03.02 0 14